• "내가 이천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으니
  • 지역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고민하다 나온 답이 상담소였죠."

이천가정·성상담소

권이금자
  • 1970년대 유선방송 사업을 시작해 27년간 운영한 그는 사업 이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고자 상담소를 열었다. 이천 지역을 위해 헌신했던 ‘참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이천가정·성상담소 대표 권이금자를 만나본다.
구술 내용 요약

유년시절, 50년 전 경제활동, 초창기 유선방송, 이천시여성연합회, 경기도여성최고지도자과정, 상담사 복지
키워드

이천, 이천유선방송, 지역사회 환원, 이천가정성상담소, 청미가족상담센터
목회자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 목회자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

경기도 이천의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권이금자는 학창시절의 자신을 ‘착실한 학생’으로 회고했다. 목회자가 되고 싶어 술을 입에 대 본 적도 없었던 학생이었다.

“목회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항상 예수님만 믿고 남이 안 가는 그런 섬 같은 데 가서 목회하고 싶다, 했는데 그 길을 안 주시고 지금 이 상담소 길을 주셨어요.”

스물두 살에 결혼한 후, 전기기술자 남편과 상도동에 전파사를 차렸지만 몇 년 못가 도둑맞고 친가의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그곳에서 수산업을 하는 친척의 도움으로 몇 년간 생선 장사를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새댁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작정 배워서 장사를 해야 했다.

“생선 남으면 어디에 팔 수가 없으니까. 시장 손님들은 좋은 것만 먹잖아요. 그럼 이제 그걸 가지고 시장 밖으로 나갔어요. 머리에다 이고. 그런데 동네 나가서 이걸 팔려면 ‘생선 사이소.’ 이래야 되잖아요. 그 말이 안 돼서 대문간에서 한참 헤매고, 사람들이 ‘아니 새댁이 왜 이런 거를 해?’ 그러면 그게 그렇게 싫었어요. 그때는 근데 악에 받쳐서 눈물도 안 나왔어. 그렇게 하면서 거기서 아이들을 키웠죠.”

권이금자는 적성에 맞지 않던 생선 장사를 접고, 아이들을 데리고 장호원 친정 근처로 올라왔다. 양재기술로 옷을 만들어 팔다가 고향 선배의 권유로 화장품 외판원을 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던 중 이천의 대한전선 대리점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기사의 권유로 유선방송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대한전선 대리점에서 일하던 기사들 중에 한 명이, 언젠가 와서 ‘아줌마, 이런 걸 해 볼래요?’ 그러는 거야. 제가 그 기사들이 동생 같아서 올 때마다 미숫가루 타서 먹이고, 더울 때는 얼음물 타서 먹이고 그랬거든요. 그러길래 제가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그랬더니, ‘제가 기술은 책임지고 해드릴 테니까 인수만 하세요.’ 이렇게 얘기하더라고. 처음에는 케이블이 아니라 유선방송이야. TV가 안 나오니까 빵빵이선을 연결해가지고 안테나를 높이 세워 사무실에서 각 가정에서 TV가 잘 나오도록 보급했던 거지.”

이천가정·성상담소 사무실
이천유선방송사업 시절 앨범
27년간, 이천유선방송사의 대표로 살다 27년간, 이천유선방송사의 대표로 살다

“사업 수완은 아무것도 없었어.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요. 내가 뭐 TV 그런 걸 알았어야지. 처음에 수금사원을 했었어요. 그때는 수금을 하면, 주인 집에서 여러 사람이 세 들어 살잖아요. 그럼 주인집은 TV 보는 데에 돈을 안 내. 셋방 사는 사람은 돈을 다 내고. 수금하면서 집집마다 TV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천 전 지역을 다 파악한 거지. 근데 이제 그러다 보니까 내 손으로 제대로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10년째까지는 조그맣게 오물락조물락 하다가 11년째부터는 제대로 좀 크게 시작했지.”

사업을 하면서 어려움이 없을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서 힘들었고, 하물며 47년 전에는 그런 일을 하는 여성도 없었다. 당시 경기도 유선방송의 지부장이 됐을 때도 여자는 그 혼자였다. 혼자 여자라는 점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권이금자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가며 조금씩 성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또 어려운 점도 있었어요. 여자가 나 하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내 말을 잘 안 했어요. 근데 그렇게 안 하면 나도 내 사업을 할 수 없으니까 쫓아다니면서 일을 한 거예요. 그러다가 이제 여자 한 분이 더 들어오면서 여자가 둘이 됐어요. 아마 전국에서 여자는 우리 둘뿐이었을 거야. 전국 집회하고 그러면 여자는 우리 둘밖에 없었으니까. 그때는 재미난 거 아니지. 힘들었을 때지. 근데 지금 보면 ‘그때 그랬으니까 우리가 지금 밥 먹고 사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최선을 다해온 사업을 정리하게 됐을 때, 권이금자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했다. 업계가 발전하면서 대기업들이 유선방송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차 기존 사업자들의 자리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종래에는 그간 해왔던 사업을 매각했고, 권이금자는 그때 생긴 자산을 어떻게 지역사회에 환원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천유선방송사 창사 24주년 기념사진
2019년 이천가정·성상담소 남부권역 거점 청미가족상담센터 개소
지역사회를 위해 시작한 이천가정·성상담소 지역사회를 위해 시작한 이천가정·성상담소

권이금자는 이천 지역에서 활동하며 1대, 2대 여성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여성연합회에서 장애우 한마당, 마라톤 대회를 열며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여성들이 모여서 힘을 합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여성 인재들을 키워내고 여성단체들이 그들을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던 중 권이금자는 당시 경기대학교에서 진행했던 여성최고지도자과정을 알게 되었고, 1년 코스를 수료하며 상담 자격을 취득했다.

“그때 경기도에서 여성최고지도자과정이 있었어요. 제가 3기생인가 그럴 거야, 아마. 이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그때 수료를 한 거죠. 그러면서 같이 했던 고민은, 제가 아이들을 여기서 다 키웠잖아요. 그래서 ‘과연 내가 이천 지역에 뭐를 환원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상담을 해야 되겠구나. 나도 잘 모르지만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상담소를 시작한 거죠.”

처음에는 자부담으로 사무실 전세를 얻었다. 이전부터 지역사회에서 봉사를 자주 해온 덕에, 상담소를 운영할 때 이천시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권이금자는 당시 상담이 필요했던 청소년들을 데리고 갯벌 체험을 다녀오는 등, 상담소의 일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버스 대절해 가서 갯벌체험하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한의원에서 깁스하고. 하여튼 나도 극성맞았어요. 지금 하라면 못 해. 그땐 젊어서 대단한 거지. 의욕이 많아. 얘네들은 정말 제대로 가르쳐야 된다, 이래가지고. 그래도 그때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깝지는 않죠. 왜냐하면 내가 좋아서 한 거니까. 그리고 내가 여기서 유선방송 사업하면서 돈을 벌었고 자식을 키웠기 때문에, 지역사회에 환원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지.”

권이금자는 상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춘 상담소를 운영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이천가정·성상담소는 내담자에게 상담료를 받지 않고, 후원금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권이금자는 항상 예산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다. 정부와 경기도, 그리고 이천시에서 지원을 해주고 있지만, 재정이 어려운 탓에 상담사들의 급여를 책임지는 일도 쉽지 않다. 그는 상담사들이 자신의 일에 보람을 갖고 꾸준히 일할 수 있도록 사회적, 제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요새 다 어렵잖아요. 경기도도 어려울 거예요. 근데 상담사들이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상담소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거죠. 급여 같은 게 깎이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해서 상담 선생님들이 자부심도 갖고,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이런 거를 실감할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바라는 건, 이 상담소가 상담 선생님들한테 제대로 급여 딱딱 주고 상여금 다 주고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그걸 원하는 거지, 다른 거 원하는 건 없어.”

이천여성연합회 회장 시절 주최했던 마라톤대회
ⓒ이천가정· 성상담소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권이금자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성씨를 함께 사용하면서 탄생한 이름이다. 처음에는 성이 둘이냐며 이상하게 여기던 사람들도, 어머니의 성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상생활에서 늘 ‘권이금자’라는 이름을 사용하다보니, 이제는 주변 사람들 모두 그를 권이금자로 안다.

“사실 난 아버지 얼굴을 몰라요. 나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 그때는 사진도 없어. 그래서 우리 아버지 얼굴도 나는 몰라. 엄마가 혼자 키웠잖아요. 내가 스물한 살 때, 엄마가 61세에 돌아가셨어. 그래서 내가 결혼을 빨리 한 거야.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다 보니까 좋은 옷도 못 입으셨어. 그래서 내가 죽을 때까지 엄마 성을 써야되겠다고 생각한 거지.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 얘기를 해주니까 ‘그러네,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이러는 남자분도 계셨어요.”

권이금자는 곧 상담소 일을 그만두고, 후배들에게 남은 일을 맡긴 후 여생을 편안히 쉬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정말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마지막으로 여성들이 힘을 합쳐 서로를 키워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상담과 교육 시스템이 사회에 정착되어 더 밝은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떠나기 전에 하지 못한 것들이 아쉽지만, 후배들이 하겠지. 더 잘할 거예요. 나는 ‘권이금자 괜찮더라. 정말 괜찮은 여자였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래서 ‘나도 저 여자처럼 그렇게 봉사하고 가겠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어요. 다른 거 바라는 거 하나도 없어요. 아, 그리고 각 상담소의 상담사들이 얼마나 힘든가를 좀 살펴주셨으면 좋겠어요. 전국 상담소들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주시면서, 귀를 열고 들어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이런 게 꼭 필요하구나.’ 하고 다들 느끼시지 않을까.”

ⓒ이천가정· 성상담소
2018년 여성가족부장관 표창